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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야기/수다로 푸는 세상

목욕탕에서 등판 때밀이 품앗이

by 威儀진칠수 2022. 11. 25.

 

     가을바람에 우수수 떨어진 낙엽이 갈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맨다. 지나는 사람들 발걸음에 밟힌 바싹 마른 낙엽은 바스락거리는 소리로 울부짖는다. 연속으로 이어진 화살 같은 줄기만 덩그러니 앙상하다. 사람 사는 세상도 건조한 모습으로 변해 가면서 습기 한점 찾기 어려울 정도로 메마르다. 세상은 갈수록 살기 좋아졌다고 야단법석이지만 사람 간의 정은 갈수록 메말라 정 쪼가리 한 닢조차 궁하다. 어느 때 보다 사람 간 주고 받는 단맛 나는 온정이 필요한 때다.

     코로나 이전에는 자주 목욕탕에 들러 삶이라는 전투에서 누적된 긴장된 육체와 더불어 꼬인 마음을 풀어주곤 했다. 삶의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이 목욕이었다. 코로나는 당연하게 여겼던 사람의 일상에 엄청난 변화를 준 것이다. 1주일에 못해도 한 번은 들리던 목욕탕이었는데 코로나 이후엔 화중지병이 되고 말았다. 올 2월 코로나 첫 감염 후 3월 어느 날 마스크로 중무장하고 그렇게 가고 싶었던 목욕탕에 다녀왔었다. 극락은 결코 서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면 그곳이 천상이고 극락이었다. 코로나 이전엔 마음만 내면 언제든지 갈 수 있던 곳이 목욕탕이었다. 그때는 목욕탕의 고마움을 알지 못했다. 산소나 햇빛의 고마움을 모르고 사는 것처럼 말이다. 매사에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살아야 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많다.

     여전히 끈질기게 인간의 멱살을 부여잡고 생떼를 부리고 있는 코로나다. 1차 감염 후 재감염을 감수하고 얼떨결에 목욕을 다녀오긴 했었다. 다시 감행하기엔 1차 때 고생한 생각이 떠올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여름이기도 해서 목욕탕 갈 생각은 접었다. 입동이 지나니 아침과 저녁 기온은 사뭇 달라졌다. 손톱 가장자리에 꺼 시렁이 일고 손등도 꺼칠해졌다. 발뒤꿈치도 이에 뒤질세라 가뭄에 쩍쩍 갈라진 논바닥같이 민망스러울 지경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잊고 있던 목욕탕이 더욱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막바지로 치닫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코로나를 무시하기는 이르다. 일상의 소소한 것까지 포기하고 살기엔 이젠 지쳤다. 늘 좋은 사람 이미지만 심어주면 사람도 바이러스도 바보 천치 취급한다. 만용인지 용기인지 목욕탕 행을 다시 결심해 본다. 재감염을 감수하고 행동에 나섰다.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천정부지로 오른다며 연일 매스컴은 경고 등을 울리지만 나는 그저 무덤덤했다. 백수의 행동반경 한정으로 체감물가 체험 기회가 원천 봉쇄되었기 때문이다. 백수의 특권이다. 오늘은 체감물가를 느껴본다. 목욕비가 코로나 이전보다 많이 인상된 것을 보고 물가의 드높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목욕비는 가성비 측면에서 불만의 대상은 아니지 싶다. 목욕탕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마스크를 형식적으로 착용하고 목욕탕에 입장했다. 평일이라 젊은이는 시야에 잡히지 않았다. 탑골공원에만 어르신들이 모이는 곳인 줄 알았더니 여기도 어른들 놀이터였다. 목욕탕에는 주로 나이 드신 어르신들만 삐거덕거리는 몸을 겨우 지탱해 가며 가까스로 움직인다. 이분들도 다른 놀이보다 부담이 덜하기에 목욕탕을 휴식처로 삼은 것이리라. 목욕비 포함하여 택시비는 여전히 가성비가 좋은 품목 중 하나다. 서민이 주로 이용하는 품목이니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누구나 목욕탕에 가면 때를 밀든 피로를 풀든 나름의 이용 패턴이 있다. 나는 제일 먼저 샤워를 하고 사우나실에 입장하는 편이다. 모래시계 한 번 돌리는 시간만큼 사우나실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눈을 감고 생각의 꼬리로 연결되는 다양한 번뇌의 여행을 해본다. 사우나실에 아무도 없을 때는 서둘러 팔굽혀 펴기도 하고 스쾃도 해 본다. 모래시계가 한 바퀴 더 돌면 맨손으로 잡기엔 뜨거워서 조금 부담스러운 사우나실 문 손잡이를 밀고 밖으로 나온다. 땀구멍이 완전히 개방되어 온몸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사우나실에서 나와 샤워를 한 다음 39도에서 41도 사이 온탕에서 잠시 신선 흉내를 내 본다. 지그시 눈 감고 멍 때리면 영락없는 신선이다. 탕에서 희끄무레하게 올라 오는 수증기가 신선의 배경 역할을 한다. 10여 분 몸을 푹 불리고 나온다. 아직 사지가 멀쩡한지라 목욕탕 전용 세신사를 이용해 본 적은 없다. 앞으로도 이용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음같이 될지는 모르겠다. 나이를 무슨 수로 거스를 것인가.

 

     목욕탕 전체 크기에 비해 사람들이 많지 않아 앉아서 때를 밀 수 있는 자리는 여유롭다. 한적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이미 퉁퉁 불대로 불은 때는 아무 저항 없이 미는 대로 밀린다. 발부터 몸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야금야금 때를 정복한다. 때는 털이 난 반대 방향으로 밀어야 잘 밀린다고 예전 어른이 그랬다. 때는 목욕탕에 오랜만에 들린 티라도 내는 듯 국숫발처럼 굵고 기다란 것이 밀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피부까지 벗길 기세다. 이 글을 보는 분이 식사 시간 전후라면 죄송하다. 때도 밀었을 때 적당히 나와 줘야 때를 미는 맛이 난다. 때 미는 맛도 중요하지만 오랜만인 목욕인지라 저축된 때가 많아도 너~무 많다. 행여 옆 사람이 볼까 염려한 나머지 연신 샤워기로 굵은 때의 흔적을 하수구로 흘려보낸다. 역부족이다. 에라 모르겠다. 보면 보라지, 자기들도 나 못지않을 것이란 생각에 남 눈치는 뒷전으로 감추기로 했다. 이렇게 온몸 구석구석을 닦았다. 왼쪽 몸은 오른손으로 오른쪽 몸은 왼손으로 번갈아 닦았다.

     그러나 딱 한군데만큼은 좌우 어느 손으로도 정복이 곤란하다. 등 뒤쪽으로 양팔 교차가 되지 않는 나 같이 뻣뻣한 사람은 등판 때를 닦을 재간이 없다. 등판 때를 밀어야만 완전한 목욕이라 할 수 있다. 옛날 옛적 등판 때밀이 품앗이 시절이 그리웠다. 언젠가 이후 늘 등을 밀지 못한 아쉬움을 가진 채 목욕탕 문을 나서야만 했다. 나만 그런 것일까. 아니다 많은 사람의 한결같은 생각일 것이다. 호랑이 담배 피던 그 시절엔 등 때밀이 품앗이가 목욕탕에서의 일상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정이 메말라 가다 보니 등 때밀이 품앗이 같은 아름다운 풍습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세신사가 그렇게 많지 않던 시절에는 등 때밀이 품앗이가 사라진 자리에 자동 등 때밀이 기계가 대신 한 적도 있다. 동그란 판에 동그란 때 수건이 감겨있었다. 꿩대신 닭이었다. 세심사가 목욕탕에 상주하게 된 후에는 이 마저도 사라져 버려 늘 등짝은 손길 한번 받지 못한 채 목욕탕 문을 나서야만 했다. 소소한 정이 그리운 이유다. 그동안 세상이 변했다고 응당 그러려니 순응하고 말았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때를 밀어 달라고 부탁하면 흔쾌히 응해 줄 것 같은 인상 좋은 분을 찾아 희열을 맛본 경우도 있긴 하다. 세상의 정은 메마른 가을 낙엽 부스러기가 울고 갈 정도로 갈수록 무미건조함이 더해 이젠 손 쓸 수 조차 없게 되었다. 긴 때 수건을 언급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고사리손보다 나을 게 하나 없다. 오호통재라 애달프고 애달프다.

 

     변한 것이 없으니 당연히 오늘도 반쪽짜리 목욕으로 마침표를 찍어야만 한다. 체념하고 마스크를 벗고 수염을 깎으려는 순간이었다. 한 칸 건너 옆에서 때를 밀고 있던 군살 하나 없는 늘씬한 몸매의 30대 후반 젊은이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저 선생님 혹시 등 밀지 않았으면 밀어 드릴까요?” 목욕탕에서 등을 밀어주겠다는 것은 등 때밀이 품앗이를 하자는 의미다. 목욕탕에서 듣던 중 이렇게 반가운 소리가 또 있을까 싶었다. 나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아, 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라고 상기된 모습으로 대답했다. 젊은이는 건장한 체격만큼 야무지게 내 등짝을 밀었다. 목 뒷덜미에서부터 아래쪽으로 때를 순차적으로 밀어 내렸다. 작은 부위마저도 빠트리지 않고 꼼꼼히 밀었다. 정말 정말 시원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했다. 마지막 용의 눈을 찍어야 그림이 완성되듯 등판을 밀어야만 제대로 된 목욕이 완성되는 것이다. 생각지도 않던 등 때밀이 품앗이를 하게 되다니, 오늘은 운수가 대통한 날이다. 다른 부위는 때를 밀어도 그만 밀지 않아도 그만일 정도로 등판 때 밀기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등판은 다른 세상인 것이다. 대나무로 만든 등 긁기의 시원함과도 감히 비교 거부다.

 

     등 때밀이 품앗이는 되살려내야 하는 우리의 비공식적인 아름다운 전통문화다. 살려내어 등 때밀이의 시원함도 만끽하고  사라져 가는 인간의 정도 복원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사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썩 내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목욕탕 가면 혼자 목욕 온 옆 사람에게 오늘의 나처럼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등 밀지 않았으면 제가 밀어 드릴까요?”라고 공손하게 말해 보면 어떨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시나 그런 사람이 있더라도 개의치 말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보자. 작은 이 한마디가 우리 사회를 사람 사는 맛을 느끼게 할 것이다. 다음 목욕탕 가면 내가 먼저 “등 밀지 않았으면 밀어 드릴까요” 라고 말할 것이다. 오늘은 진짜 운수 대통한 날이다. 그래서 기분 좋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