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의 줄넘기 역사가 한 세대를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초 나는 경상북도 어느 시골에 위치한 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교도관은 인내를 요하는 상당한 스트레스가 동반되는 직업이다. 적성에 맞는 사람과 사명감이 남다른 분은 다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평생 몸 담기에 한계가 있는 직업이다. 수형자 기거 사동舍棟에 들어가는 순간 수형자와 기싸움은 시작된다. 규정을 어기려는 자와 이를 제지하려는 자와의 기싸움이 여간 심한 게 아니다. 사동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다양한 일들로 수형자와 부딪혀야 하는 갈등은 상상보다 크다. 남들 출근할 때 퇴근해야 하고 퇴근할 때 출근해야 하는 근무 시스템(지금은 3교대)도 알게 모르게 받는 고충이다. 탈출하고 싶었다.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그만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근무하면서 다른 직렬 시험을 보는 것이었다. 다니면서 일반 행정직 시험에 도전하기로 했다. 주근야독, 야근주독이 시작되었다. 합격의 그날을 위해 쉬는 날은 언제나 독서실로 향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짧은 가방끈과 모자란 능력 탓에 교도관 생활 4년여 동안 수험생활은 계속되었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과 비례하여 내 복부는 임산부와 비슷하게 변해 갔다. 내 몸은 세상 넓은 줄 모르고 평수를 확장해 갔다. 사정이 이래도 운동할 여건은 되지 못했다. 하루는 낮에 하루는 밤에 근무하는 날들이 1주일마다 뒤바뀌며 반복되었다. 짬이 나도 시험공부에다 부족한 수면 보충하기 바쁜 나머지 운동은 사치품의 한 종류에 불과했다. 시골에서 체육관은 1990년대 초라는 시대적 상황과 오지에 가까운 특수성을 감안할 때 언감생심 바랄 처지는 아니었다.
볼록 나온 복부와 옷 틈새로 삐져나올 것만 같은 두툼한 살점들을 통제할 수 있는 특단의 조치는 필요했다. 답은 운동이었다. 틈을 내 체육관이 있을만한 안동이라는 인접 도시까지 가는 수고를 해서라도 체육관을 이용하여 운동을 하든지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시골학교 운동장에서 홀로 뜀박질을 하던지 어떤 방식으로든 운동이 필요했다.
이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나의 30년 줄넘기 역사는 시작되었다. 시골 독서실 뒷마당이 줄넘기 진원지가 된 셈이다. 처음 시작은 100개였다. 날이 갈수록 줄넘기 숫자는 늘어 갔다. 100개에서 150개로 다시 200개로 300개로 끝없이 늘어 갔다. 이렇게 늘어간 줄넘기 숫자는 달이 지나고 해가 거듭되면서 5,000개(환갑 후 3,000개로 줄였음)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습관이 된 줄넘기는 중단을 몰랐다. 1년 365일 줄넘기를 하지 않은 날은 기억에 없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더라도 손에 꼽을 정도로 확신한다.
줄넘기 덕택에 복부는 원상 회복했다. 신체와 정신도 모두 건강해졌다. 건강해진 몸으로 시험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합격의 희열을 맛볼 수 있었다. 기나긴 여정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줄넘기 역사는 시험에 합격하여 새로운 근무지에서도 예외 없이 계속되었다. 국내외 출장 시에도 줄넘기는 챙겨야 할 목록 1호가 되었다.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독보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이제 줄넘기를 빼고 내 개인 역사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줄넘기를 건너뛰는 날은 발바닥에서 가시가 돋을 정도였으니 가이 독한 종자라 할만했다.
이런 대단한 나의 줄넘기 역사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2020년 초 어느 날 문득 우리 모두를 향해 찾아온 코로나19(이하 환란)가 그 변화의 주범이다. 처음 사람들은 몇 해 전 우리를 긴장하게 했던 메르스 정도로 생각했던 같다. 머지않아 곧 물러갈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다. 환란은 안일한 우리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비켜갔다. 2~3개월이 아닌 1년을 넘겨 아직도 진행 중이다.
환란은 일상을 전쟁 폐해에 버금갈 정도로 초토화 시켰다. 심한 비유라고 고개를 갸우뚱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각종 지표를 보면 결코 심한 비유가 아니다. 외국은 심각성이 더했다. 완전한 퇴치가 안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K-방역은 외국과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우수했다. 그럼에도 환란의 기본 폐해는 어찌할 수 없었다. 분야와 업종을 막론하고 점포는 하나 둘 문을 닫았다. “점포 임대”라는 글씨는 한집 건너볼 수 있다. 탁자와 의자는 환란 이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영업은 줄줄이 휴업 아니면 폐업 상태다. 전문가들은 환란 이전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슬프고 암담했다.
어려움은 체육관이라고 다를 리 없다. 오히려 밀집도가 높아 정부 제재는 더 구체적이었다. 휴업이 길어지자 체육관 단체에서 시위까지 하였다. 나도 체육관은 더 이상 이용할 수 없었다. 장고한 나의 30년 줄넘기 역사가 중단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시공을 초월했던 줄넘기도 이 환란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바깥에서 줄넘기를 할 수도 있지만 어려움이 있다. 살을 에는 듯한 강추위와 폭설에는 제간이 없다. 줄넘기 역사가 길고 제아무리 마니아라 할지라도 중단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365일 줄넘기를 했던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다. 1주일이 지나자 신체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60을 훌쩍 넘긴 나이에 웬 오십견인가 싶었고, 소화불량은 가장 먼저 나타난 증상이었다. 정신이 몽롱해졌고, 지극히 정상이었던 혈압도 상승했다. 몸이 무너지니 정신도 함께 무너졌다.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시공을 초월하여 대체 가능한 운동을 찾아야 했다.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라는 성경 말씀이 생각났다. 간절히 원하면 섬광이 비칠 것이다. 궁하면 통할 것이라는 용기되는 말들이 꼬리를 이었다.
허리 통증과 무릎 관절로 고생하는 아내에게 108배를 권하면서 좌복(절할 때 사용하는 방석)을 구입해 준 적이 있다. 아내는 힘들다며 사용하지 않고 좌복을 베란다에 방치했다. 그 좌복이 운동에 목말라 한 나의 눈에 번쩍 띄었다. 절이 운동에 좋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터다. "옳거니 줄넘기 대신 108배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사찰에서 3배를 한 적은 많다. 그러나 108배를 한 적은 거의 없다. 108배가 만만하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누구던가. 줄넘기 5,000번 하던 사람 아니던가. 그것도 30년간 거의 매일 했던 사람이 아니던가. 줄넘기에 비하면 108배는 새 발에 피다. 주저앉을 내가 아니다.
이렇게 줄넘기 대체 운동으로 매일 1번 이상 108배를 하게 되었다. 며칠은 힘들었다. 사용 근육이 줄넘기와 달랐기 때문이다. 줄넘기로 단련된 기본 체력 덕분에 108배는 금세 내 몸과 융화되었다.
절은 줄넘기와 마찬가지로 장소와 시간 제약이 없다. 집안 어느 곳에서나 할 수 있다. 안방에서도 큰 방에서도 거실에서도 가능한 것이 절이다. 다만 무릎이 직접 지면에 닿는 만큼 푹신한 요나 좌복은 필요하다.
절은 시간을 따로 낼 필요도 없다. 낮이나 밤이나 아침이나 저녁이나 하고 싶을 때 하면 된다. 절은 집안에서 하기 때문에 경제적이다. 돈이 들지 않는다. 돈 들지 않고 할 수 있는 운동이 어디 흔하던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다. 초보 기준으로 30분 정도면 할 수 있다. 익숙한 사람은 15분~20분이면 족하다. 시간 부담 없이 효과는 줄넘기에 맞먹는다. 줄넘기와 마찬가지로 절은 전신 운동이다. 전신에 연결된 뼈마디를 움직이게 하는 운동이다. 운동 효과는 상당하다고 알려졌다. 성철 스님도 절 예찬론자 중 한 분이시다. 성철 스님을 뵙기 위해서는 3,000배를 해야 한다고 알려져 있다. 왜 그랬겠는가? 효능이 보장되었기에 중생을 그렇게 인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세상은 잘 난 사람 천지다. 많은 이들이 고개와 어깨에 힘을 주고 으스댄다. 그렇게 으시댈 정도로 잘 난 사람인가는 늘 의문이다. 절은 이런 뻣뻣한 머리와 어깨를 유연하게 하는 역할도 한다. 절 삼매경에 빠지면 무념무상의 상태가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한없이 가벼워 짐을 느끼게 된다. 도는 이렇게 닦는 것인가 싶다. 환란 시대에 실내에서 “절”만한 운동은 흔치 않다. 108배는 종교를 떠나 실내에서 할 수 있는 멋스러운 운동이다. 수양은 덤이다.
여건만 되면 줄넘기는 언제라도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108배도 겸해서 말이다. 운동을 못해 신체가 근질 근질 하신 분은 주저 말고 108배에 도전해 보시길. 108배는 일거다득이다. 건강, 수양, 다이어트, 시간 절약, 하심에 의한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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